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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의 논문 및 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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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3-02-23 15:21:58  (조회수: 6955)
이 름    우실하
Homepage    http://www.gaonnuri.co.kr
다운로드 #1    1998,_경제_위기_시대의_생태적_건강_찾기,_환경과_생명_18호_(1998.12월).pdf (911.7 KB), Download : 66
제 목    경제 위기 시대의 생태적 건강 찾기:[환경과 생명]제18호(98겨울호)


아래의 글은  [환경과 생명] 제18호(98년 겨울호)에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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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3<환경과 건강>
경제 위기 시대의 생태적 건강 찾기

                             우 실 하 / 연세대 강사·사회학  

1. '건강'의 총체적·생태적 함의

우리는 일반적으로 '건강'이란 단어를 한 사람의 몸에 병이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국어대사전}에서도 "몸에 아무 탈이 없이 튼튼한 것. 또는 그러한 몸의 상태"로 '건강'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한 사람의 몸은 전체적인 우주적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런 건강 개념에 따르면, 한 사람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자신의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담뱃재를 차창 밖으로 버리는 것은 한 사람의 건강을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한 국가의 산업 폐기물을 공해(公海)상에 투기하는 것이나 산업 폐기물을 가난한 제3세계에 수출하는 것은 한 국가의 건강을 위해 다른 많은 국가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다. 또한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오존층을 파괴하고 전 세계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인간 이외의 지구촌 생명체인 각종 동·식물들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지구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도 부여받은 바가 없다. 전체의 건강이 무시된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뒤에 상론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말도 안되는 논리를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현대 자본주의이다. 자본의 논리와 국익의 논리는 엄청난 환경 재앙을 여러 형태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둘째, '건강'을 "몸에 아무 탈이 없이 튼튼한 것. 또는 그러한 몸의 상태"로 정의할 때에는 '정신적인 건강'의 영역이 축소된다는 점이다. 물론 사전적인 정의에서 사용된 '몸'이라는 단어가 '육체'와 동의어가 되는 경우에는 '정신적인 건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한자대전}에서는 '건'(健)을 (1) '굳셀 건'(强有力), (2) '병 없을 건'(無病), (3) '탐할 건'(貪也)으로 풀이하고 있고, '강'(康)은 (1) '편안할 강'(安也), (2) '즐거울 강'(樂也), (3) '화할 강'(和也), (4) '다섯거리 강'(五達衢), (5) '풍년들 강'(年豊), (6) '헛될 강'(空也), (7) '성 강'(姓也)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건강'이라는 한자어에서는 '건'(健)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건강'(强有力ㆍ無病)을 의미하는 것이고, '강'(康)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건강'(安也ㆍ樂也ㆍ和也)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이라는 한자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육체적으로 굳세고 병이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편안하고 즐거우며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것, 혹은 그런 상태'라고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대전}에서 '건'(健)이라는 한자에 딸려 있는 '건강'이라는 명사에 대한 한글 설명에는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음"이라고 실려 있다. 이것은 한자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고, {국어대사전} 식의 설명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인다.

한편 {영한사전}에서는 '건강'(Health)이라는 것을 (1) '(심신의) 건강(상태); (몸의) 상태', (2) '(건강ㆍ행복 등을 기원하는) 축배, 건배', (3) '(국가ㆍ사회ㆍ문화 등의) 건전; 활력; 안정; 번영', (4) '보건, 위생'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고대 영어 'hælth' 혹은 'halth'에서 'hal'은 'WHOLE'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체임',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영어에서도 '건강'이라는 것이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 뿐만 아니라, 국가ㆍ사회ㆍ문화의 건전함이나 안정 등이 포함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한자나 영어에서는 건강이라는 개념이 총체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고, 유독 한글에서만 의미가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의학계에서도 정신적인 건강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마당에, 한글의 '건강' 개념도 의미를 확대시켜 총체적이고 생태적인 의미까지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한 개인이 건강한 삶을 산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건강함은 물론, 주변의 자연 환경과의 총체적인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데서 오는 정신적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아나바다의 미덕'과 '소비의 미덕'

며칠 전 쌍둥이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아나바다 운동'(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을 한다고, 아이들이 쓰던 물건들 가운데 싫증나거나 몸에 맞지 않는 옷ㆍ운동화ㆍ장난감 등을 가져간 적이 있었다. 모인 물건들을 싼 값에 학생들에게 팔아서 마련된 기금은 불우 이웃을 돕는데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내와 함께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은 300원 짜리 신발, 500원 짜리 청바지, 300원 짜리 한자 학습지, 500원 짜리 잠바를 사 입고는 좋아서 나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침 신문에서 본 '소비가 미덕'이라는 제목의 큼지막한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IMF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위축된 소비를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조업체들이 제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각종 특소세를 낮추고 소비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기사는 우리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경제적인 처방'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인류의 삶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일 때 과연 '소비가 미덕'이 되는 경우가 있을까?

필자는 중ㆍ고등학교 때 이와 비슷한 논리를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막대한 투자로 완성된 생산 기반을 멈추지 않게 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생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생산된 제품을 사 주어야 하기 때문에 '소비가 미덕'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생산 기반을 확충해야 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산업 기반 시설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저축이 미덕'이라는 논리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외우고 시험 답안지를 메우던 이런 논리가 과연 타당한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나바다의 미덕'과 '소비의 미덕' 사이의 이러한 괴리와 논리적 모순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소비가 미덕'인 사회로 가야 하는가? 아니 정말로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있는 것일까?

3. 현대 자본주의와 기호 소비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 상황은 과잉 생산으로부터 온다고 필자는 본다. 한 해에 2,000만 명이 굶어 죽고 있는 현실에서도, 많은 문명국에서 생산된 식용 가능한 식품들은 (식용이 아닌)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의 먹이가 되고 있거나 유통 기한이 지나서 폐기 처분되고 있다. 개를 식용으로 먹는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야만인 운운하면서, 애완용 개를 위한 식품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엄청난 먹거리를 낭비(?)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 단순히 자본주의 비판 쯤으로는 우리 시대의 산적한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제는 단순히 자본주의 비판에서 벗어나 20세기 인류의 문명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이윤 창출이 최대의 목표인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상품을 생산해내고, 필요한 것 이상을 구매하게끔 소비자들을 자극한다. 이를 위해서 자본가들은 몇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첫째, 계절별로 신상품을 개발하여 유행을 창출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멀쩡한 제품들을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 제품이 되게 만든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유행이 지나서 장롱 속에 깊숙이 처박혀 있는 옷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남을 주자니 아깝고, 입자니 유행에 뒤처진 것 같아 입지는 못하고 사장되어 있는 이러한 멀쩡한 옷들은, 이사할 때마다 골칫거리다. 그런데도 계절별로 신상품이 나오고, 그 상품의 광고에 솔깃해서 또 한 벌씩 구매를 한다. 이런 모순과 낭비(?)가 왜,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

상품은 '사용 가치'와 '기호 가치'가 결합되어 있다. 사용 가치란 상품의 본래적인 용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옷의 경우에는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이 사용 가치에 해당한다. 기호 가치란 특정 상품에 부가되어 있는 것으로, 그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ㆍ명예ㆍ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 기능하며 '신분적 차이 표시 기호'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랜저 3.5'라는 자가용은 단순히 사람을 신속하게 실어 나르는 자동차로서의 사용 가치 이외에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상징하는 '신분적 차이 표시 기호'로서 소비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중심은 사용 가치에서 기호 가치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사용 가치가 다하지 않아도, 새로 나온 신상품을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또 다시 구매하고 소비하는 '기호 소비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호 가치를 생산해주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광고'이다. 광고를 통해서 현대 기호 소비 사회의 소비자들은 새로운 신상품에 대한 정보를 얻고, 유행에 앞선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품을 소비해야만(?) 한다. 물론 아직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고, 이들은 여전히 튼튼하고 실용적인 제품을 사용 가치의 측면에서 구매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현대 기호 소비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제품의 기호 가치를 소비하고 있고, 이런 소비 형태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는 재생산되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영복을 한 벌 사서 수영복의 사용 가치가 다할 때까지 입는다면 -- 곧, 수영복이 구멍이 나거나 헤질 때까지 입는다면 -- 이 세상의 수영복 회사는 모두 5년 안에 망할 것이다. 일년에 3-4번밖에 입지 않는 수영복이 구멍이 나거나 헤질 정도가 되려면, 모르긴 몰라도 200년은 입어야 될 것이다. 200년 동안 신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수영복 회사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수영복 회사로서는 그냥 앉아서 망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매년 여름마다 유행을 만들어 새로운 신상품을 유통시킨다. 작년에 원피스 수영복이 유행했다면, 올해에는 절대로 원피스가 다시 유행하지 못하게(?) 투피스나 쓰리피스를 유행시킨다. 그 다음 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원피스가  유행하게 되면, 이번에는 옷감의 무늬를 바꾼다. 곧 2년 전에는 원피스에 '줄무늬'를 디자인했었다면, 올해는 원피스에 '물방울무늬'를 유행시키는 것이다. 유행의 순서는 하늘에 별도로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수영복 회사와 공존 공생하는 소위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필자는 강의 시간에 기호 소비 문제를 다룰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한다. 곧, 현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는 이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상품을 구매할 때마다 그 상품의 사용 가치가 다할 때까지만 사용한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10년 안에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류의 생명을 지킨 공로로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부상당해 누워 있는 노병(老兵)처럼, '존경하지만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없는 부상자'일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가야 한다. 대안을 모색하는데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떤 논리를 통해서도 '소비가 미덕'인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경론자들의 철학과도 연결될 수 있고, 앞서 설명한 '아나바다'의 미덕과도 곧바로 연결된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이러한 '아나바다의 미덕'과 '소비의 미덕'이 어정쩡하게 공존하고 있다. 양심과 도덕의 명령은 아나바다 운동을 미덕으로 추켜세우지만, 한편으로는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가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과 현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는 있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있어서도 안된다.                    
  
  4. 정신적인 건강

한 개인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새삼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한 개인의 정신적 건강이란, 지구 전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자신의 삶을 자리매김하는 데서 온다고 본다. 공간적으로는 가정과 국가의 범주에서 벗어나 지구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 시간적으로는 생명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후손들이 살아갈 아득한 미래까지를 염두에 두는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을 정신적인 의미에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윤을 추구하더라도 지구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고, 우리들의 후손들까지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약을 뿌려 기른 콩나물을 팔면서 혹시나 이것을 자기 자식이 먹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지닌 정신적인 모순과 혼란 상황은, 그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유기 농산물을 먹으면 건강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식물 국회를 만들고도 월급을 타 가는 사람들도 모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이들의 정신 세계에서 시간 범주는 현재에 머물러 있고, 공간적으로도 자기 개인ㆍ가정ㆍ정당 차원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아나바다'의 미덕과 소비의 미덕 사이의 모순과 괴리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소비가 미덕이 되는 그런 사회에서 우리들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정신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공간적으로는 한 국가의 범주에서만 이익이 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미래와 지구적 차원의 불이익을 감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더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할 때가 된 것이다.  

  5. 동양의 각종 건강법에 대하여

최근 전통 문화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면서,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각종 건강법이 사회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요가, 명상, 단식, 생식, 기공 등등 실로 다양한 형태의 수련법들이 이미 소개되어 있다. 필자는 이런 수련법들이 실제로 육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에 많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에 대해서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철학적 세계관은 하늘과 땅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체득(體得)하는 것을 궁극으로 삼고 있다. 흔히 이러한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도'(道)라고 부르고, 이것을 체득하기 위한 과정을 '도를 닦는다'(修道)라고 표현한다. 사실 이러한 '도를 닦는' 자세는 수행자들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모든 문화적 활동의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음(音)으로 드러내는 것이 악(樂)이었고, 구체적인 몸의 실천으로 드러내는 것을 예(禮)라고 불렀다. 글씨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서예(書藝) 혹은 서도(書道)라고 하였고, 차(茶)를 내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다례(茶禮) 혹은 다도(茶道)라고 불렀으며, 검(劍)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무예(武藝) 혹은 검도(劍道)라고 불렀던 것이다. 동양의 정신 세계에서 '도'(道)는 언제나 악(樂)이나 예(禮)와 연결되는 개념이었고, '악'과 '예'는 대부분 함께 언급된다.

단식, 생식, 기공, 호흡법, 요가 등이 우선적으로 육체적 건강에 초점을 둔 방편이라면, 명상, 좌선 등은 정신적 건강에 우선적인 초점을 둔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굳이 '우선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것은 이 모든 동양의 건강법에는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이 다 고려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건강으로서의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수련을 하는 것은 단지 '술'(術)에 머물 뿐이다. 그런 까닭에 '검도'나 '무예'는 '무술'(武術)과 구별되고, 예악을 아는 사람과 악공(樂工)ㆍ기녀(妓女)가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앞서 이야기한 이런 전통적인 수련법들이 정신적 건강으로서의 철학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운동'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전통적 건강 수련법들에도 이런 전통적인 철학과 사상이 이어지고 있는가? 많은 분들이 그런 토대와 사상 위에서 가르치고 전수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는 분들이 그런 철학을 체득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나 그 비율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앞에서 필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시공의 범주를 우주적으로 확대한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렇게 사고의 범주를 전체 우주로 확대하여 천·지·인의 조화로운 질서를 도모하는 것은 동양 세계관의 기본적인 토대이다. 육체 하나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삼아 수련을 한다면, 이것은 잘 전승된 우리의 전통 문화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신적 수련을 병행하면서, 우주적 조화의 개념이 지닌 정신적인 건강함을 공간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 문명의 위기 상황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함에 있어 우리의 전통 문화가 일상 생활에서 새롭게 기여할 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 현상이 벌어지는 자연 환경 전체의 건강이 전제되지 않는 건강한 삶이란 불가능하고, 이런 총체적인 건강관은 동양의 세계관에는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 '기워 신는 양말'과 '바리공양'

필자는 앞에서 현재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을 '부상당한 노병(老兵)'에 비유한 바 있다. 이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대안을 실질적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꼭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현재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재강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제 더 이상 '소비가 미덕'인 사회를 만들어 가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소비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이들부터 모든 상품의 '사용 가치'가 다할 때까지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양말을 기워서 신곤 했다. 양말을 기워서 신는다는 것은 '사용 가치'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현대 사회에서 양말을 기워서 신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아이들은 양말을 기워서 신게 하고 대부분의 옷도 한 동네 형들이나 아는 분의 아이들 가운데 작아서 못 입는 옷들을 물려 입은 것들이다. 필자도 기워서 신는 양말이 제법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왜 양말을 기워서 신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고 따른다. 이런 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해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최근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동양사회사상학회'에서는, 회원들 간의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식기인 '바리'(혹은 '바리때'라고도 함) 20벌을 주문했다. 그릇 2개(국그릇, 밥그릇)에 뚜껑 1개(반찬그릇)와 수저로 이루어진 가장 간단한 형태였다. 1년에 몇 번씩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동양사회사상학회의 세미나를 열고 있는데, 이때 남아서 버리는 음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겨울부터 열리는 세미나에서는 바리공양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동양 사상을 공부하는 학자들로서 최소한 동양 철학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인 셈이다. 우리 학회에서 먼저 사용을 해 보고 일반인들에게도 보급해 보기로 하였다.

철학과 이어진 구체적인 실천이 없이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방관자로 머물면서, '자신과 똑같은 남들'을 언제까지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비록 작은 실천이라고 하더라도 철학과 이어질 때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고, 여럿이 더불어 한다면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    

  7. 글을 마치며  

최근 넘쳐나는 각종 건강 보조 식품 광고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강 문제를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건강한 삶이란 사회 구조의 건강함과 자연 환경의 건강함과 분리되어 논의될 수 없다. 이웃이 병들어 있는데 혼자서 건강하다고 해도 즐거울 리가 만무하고, 인간과 함께 지구상에 살아가는 각종 동·식물이 죽어 가는데 인간만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건강한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이미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개인이 어떻게 해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지구적인 문제인 관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들은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방관자의 입장은 언제나, 엄청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줄 '초인'(超人)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초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수많은 강제와 독단에 입각한 권위주의적 독재일 뿐이다.

이제는 '초인'을 기대하기보다는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초인적인 실천력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아주 조금씩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환경 문제는 언제나 나와는 상관없는 환경론자들만의 문제가 될 뿐이고 △'건강'이란 총체적인 맥락을 잃어버리고 단지 '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울퉁불퉁한 근육을 떠올리게 될 것이며 △자본가들과 기업인들이 그들의 최대 이윤 창출을 위해서 굴려 가는 현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은 지속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것이며 △그래서 결국 우리의 미래, 우리 후손들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1)김민수 외, 1991, 『국어대사전』서울: 금성출판사:122쪽

2)이가원·장삼식, 1973, 『한자대전』서울: 유곡출판사: 115-116, 499-450

3)-------, 116쪽

4)『뉴에이스 영한사전』, 1986, 서울: 금성교과서주식회사: 10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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